새로 시작한 일은 즐거웠다.
일을 시작한 곳은 청담동이었다.
교육열이 높고, 경제 수준도 높았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영민했다.
예의도 바르고 학구적이었다.
사회가 우려하는 문해력과 인성 문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학생이지만 성인 수준의 대화를 나누었다.
달러 패권, 기후환경 같은 문제였다.
아이들과 나누는 지적 사유는 즐거웠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과정이란 사실을.
뾰족함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독서와 글쓰기 교육이 아니었다.
더 즐거운 일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 변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칭찬을 할수록 아이들은 글쓰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성취감을 느꼈다.
짜릿했다.
진심을 다했다.
학부모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마치 끌어당김의 법칙처럼 학부모들이 먼저 연락을 주셨다.
선물도 받았다.
덕분에 회사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별 연봉 인상도 있었다.
그런데 또 퇴사를 결심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싫은 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30살이 넘어서야 깨달았다니,
이토록 낮은 수준이었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평생 찾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지, 왜 좋은지
무엇이 싫은지, 왜 싫은지를
뾰족하게 다듬어가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좋아하는 일도 싫어지니 혼란이 생겼다.
무엇이 싫은지 찾기 시작했다.
이 때는 좋은 일보다 싫은 일을 찾는 게 효과적이다.
싫은 감정은 강렬하다.
하기 싫은 일을 골라내면, 좋아하는 일이 선명해진다.
나는 학원 시스템이 싫었다. 매뉴얼도 싫었다.
내 것을 가지지 못한 게 불만이었다.
내가 만든 매뉴얼과 철학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본질을 실현하고 싶었다.
내 철학을 펼치지 못하는 한계에 답답함을 느꼈다.
미욱한 청년은 아직도 현실 앞에서 정신 차리지 못했다.
이때 '이만하면'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부추겼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잖아"
"이만하면 좋은 직장이지"
"이만하면 좋은 사람이지"
"이만하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다는 뜻이다.
이만하면은 현실 앞에 자주 나타난다.
"앙박아"
"이만하면 즐겁잖아"
"이만하면 공무원 월급보다 나쁘지 않잖아"
다시 주저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때 느낀 그 감정이었다.
다시 세상과 타협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비로소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그대로임을
공무원만 그만두었을 뿐, 제자리였다.
아직도 나는 과거에 있었다.
과거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지 못했다.
과거를 완전히 끝내야 새로운 현실이 나타난다.
잃어야 얻을 것이 생기고, 떠나야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과거에 있었다.
위기 의식을 느꼈다.
다시 머무른 순간 변화는 없다.
공무원 퇴사는 영원히 실패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표를 냈다.
두 번째 사표는 쉬웠다.
최선일까?
이제 나는, 과거의 나를 완전히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