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직장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앙주사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퇴사 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바로 퇴사 직후였다.
퇴사 전 나는 고통을 재단했다.
두 가지 고통 중 어느 것이 더 견딜 만한지 고민했다.
'불안함'과 '불행함'
나는 '불행함'보다 '불안함'이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불안함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불행함은 직장을 나오지 않으면 바꿀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불안함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얕봤다. 고통 앞에서 내 자유의지는 처참히 무너졌다.
인생이 망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스스로를 인식의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민낯을 마주하며, 대책 없이 퇴사한 무게감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생의 난도를 쉽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사 후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고통은 여전히 달갑지 않다. 피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영어에 "Sweet pain"이라는 구어적 표현이 있다.
정식 단어는 아니지만,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달콤한 고통이라니 모순이 아닌가?
여전히 아침마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실체 없는 두려움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두려움은 나를 잠식한다. 고통스럽다.
대체 고통이 어떻게 스윗할 수 있다는 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냥 썩소가 나온다.
처음엔 이 고통이 너무 버거웠다.
마치 길에서 곰을 만난 것처럼, 얼어붙은 듯 온몸이 굳는 고통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조금 나아졌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고통이 또 찾아왔구나"라는 걸 인식한다.
그리고 고통이 금세 사라질 것임을 안다.
점점 고통에 대한 나만의 철학이 생기고 있다.
처음엔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리 아프지 않다. 점점 자신감도 생긴다.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퇴사 후 이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직장이 소중한 보금자리였다는 사실과,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내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며, 메타인지 없이 우쭐한 채로 살았을 것이다.
No pain, no gain은 맞다. 퇴사 후 고통을 통해 나는 새로운 인식 체계를 얻었다.
고통 덕분에 내 삶에 소중한 것들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젠 '사랑'과 '알아차림'이라는 새로운 단어들이 내 삶을 차지하고 있다.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사 전 고통이 없었다면,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하면 무릎에 고통이 생긴다.
처음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이 고통을 두려워한다. 무릎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든다. 이때가 첫 번째 고비다. 무릎 부상을 두려워해 달리기를 멈추면, 결국 달리기를 중단하게 된다.
사실 이 고통은 무릎을 보호하기 위한 근육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부상이라 생각하고 포기한다.
물론 무릎 부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직면하고 근원을 파악하면서 견뎌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쉽게 하면 어려워지고, 어렵게 하면 쉬워진다"
성공한 사람들의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매일 힘든 시간을 보낸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고통을 신선한 자극으로 바꾼다.
그게 바로 "Sweet pain"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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