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기로운 퇴사는 실패로 끝났다.
퇴사를 ‘실패’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 실패를 ‘사고’로 받아들인다.
퇴사는 내 인생에 일어난 첫 번째 사고다.
그렇다면 나는 왜 퇴사를 실패로 정의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퇴사한 게 아니라, 도망쳤기 때문이다.
나는 퇴사를 왜곡했다.
퇴사는 용기 그 자체이자, 원하는 삶을 위한 도전이라고 믿었다.
착각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사실 퇴사는 ‘자유의지’가 아닌, 무의식이 만든 ‘도망’이었단 사실을..
퇴사 뒤에 숨겨진 진실을 인정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신입이었다.
소위 “알잘깔딱센”으로 상사의 칭찬을 받으며 성과를 인정받았다.
‘일을 잘한다’는 말은 곧 나의 존재 가치였다.
칭찬을 받을수록 더 많은 사랑과 인정을 탐닉했다.
그래서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덕분에 빠르게 승진하고, 중요한 보직까지 맡았다.
공무원으로선 승승장구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내면은 서서히 병들어갔다.
승진을 하고 중요한 일을 맡을수록 두려움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두려웠을까? 인정 욕구였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두려움의 실체를 몰랐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저 두려움을 ‘또 다른 인정’으로 억누를 뿐이었다.
이제 두려움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인정욕구가 아닌 ‘퇴사를 갈망하는’ 형태로 뒤틀린 것이다.
완전히 왜곡된 감정이었다.
겉으로는 퇴사를 원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퇴사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본청 발탁이었다.
조직의 심장부에 들어가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영전’이라며 축하했고, 부러움과 기대가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은 폭발 직전이었다.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더 높아졌고, 불안과 압박도 그만큼 커졌다.
두려움은 서서히 일상을 잠식했다.
결국 나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퇴사를 선택했다. 두려움에서 도망친 것이다.
퇴사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 문제는 직장도, 업무도 아니었다.
문제의 본질은 내가 그동안 억압하고 외면했던 ‘두려움’이었다.
그동안 나는 두려움을 또 다른 인정으로 덮어왔다.
이번에는 퇴사라는 방편으로 두려움을 피해보려 했다.
그러나 도망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결국 도망 앞에서 나는 무너졌다.
퇴사 후의 날들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인생이 망가졌다는 절망감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아픈 날은 더 아팠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도 많았다.
문제의 본질인 감정을 마주하지 못한 게 실패의 근원이었다.
그 사실을 퇴사 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수준이 곧 삶의 수준을 만든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건 고작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무의식에 숨어 있다.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무의식이 결정한다.
무의식이 감정을 지배하고, 그 감정이 결국 선택을 이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선택했다고 착각할 뿐이다.
그래서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나에게 부족했던 건 ‘메타인지’였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봐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두려움을 외면한 채 피하기만 했다.
결국, 내 퇴사는 두려움에서 도망친 방편이었다.
그래서 실패했다.
도망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오직 ‘직면’뿐이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근원을 직시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